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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의 정난주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토론회를 참석한 소감

작성자  |노아가다 작성일  |2023.12.18 조회수  |236

"제주교구의 정난주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토론회를 참석한 소감"


안녕하세요! 노정남 아가다입니다.
먼저 어려운 가운데 학술발표회를 준비해주신 제주교구장 문창우 비오 주교님과 수고하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토론을 준비해주신 학자들께도 고생 많으셨다는 인사 말씀 전합니다.

오래 전, 2017년도인가에 쓴 것으로 기억되는, 서투른 글을 기억했다가 잊지 않고 초대해주신 제주교구에 거듭 감사 인사드립니다.
먼저 발표장에서 쫓기듯 저의 생각을 말씀 드린 점에 대해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립니다.
발제에 너무 많은 시간을 가지셨고 우려스럽게도 소설을 기반으로 끌고 간 점에 약간의 지루함과 함께 팩트를 알고 싶어 참석했던 저로서는 유감이 많았습니다.

저는 정명련 선조의 본래 이름을,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찾아주고 불러주고 신앙인으로서의 삶으로 견디어낸 제주도 대정현에서의 관비의 일상을 알고 싶어 달려갔습니다.
학술발표회를 통해 많은 자료를 보고 궁금증을 풀어보고자 하였지만, 발표를 통해 들은 건 구전으로 내려온 자료뿐이었습니다. 심지어 소설은 허구이며 창작이며 작가의 주관적 서술을 흥미롭게 끌어가는 매개체일 뿐인데, 그런 내용을 공식적인 학술발표의 장에 끌어들인 건 우려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정난주라는 이름이나 소재를 공식적인 가톨릭교회사에 비춰 문학적 형상화를 통해 역사적 진실을 묻어버리는 건 정말 걱정스럽습니다.
한국 천주교의 뿌리이자 발상지와도 같은 가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복자 정약종 가계도의 당당한 후손인 장녀 정명련이라는 이름이, 그 의미가 문학적 형상화에 묻혀버리는 건 아닌지, 정말 안타깝습니다.

바티칸박물관에 소장된 황사영 백서의 진실, 그리고 제주에서의 정명련의 삶이 얼마나 처절했을지, 가늠이 된다면, 그건 그 분이 오직 신앙을 가슴에 품고 의지하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건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더욱이 ‘정난주’라는 이름이, 또 ‘마리아’라는 세례명이 1970년대에 등장해 불리기 시작했다는 말을 듣게 된 것은 경악스러웠습니다.
세상에 어떤 이름이 죽은 지 100여 년이 훨씬 지나 만들어지고 불리고 역사적 진실까지 외면하게 하는지, 이게 교회사가 지향하는 역사적 진실인지 절망스럽습니다.
그러기에 지금이라도, 늦었지만 지금이라고 찾아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매일 묵주 기도를 올립니다.
그의 숙부 정약전과 정약종, 정약용, 3형제(물론 맏이 정약현, 막내 약횡도 있지만), 외숙 이벽, 고무부 이승훈 등은 18세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당대 최고의 지성이자 천주교와의 인연이 얽혀 있는 분들이기에 정명련이라는 역사의 이름을 찾아 주셔야 더 빛이 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숙부들에게서는 서학을, 고모부에게서는 세례를 받은 정명련의 신앙은 혈당의 전방위적 지원과 훈련으로 성장했기에 그는 제주에서도 모진 삶을 견디어 냈을 것이라고 봅니다.
정명련은 노비의 신분으로 여생을 살았지만, ‘한양 할망’으로 존경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른바 ‘난주’(蘭珠)로도 알려져 있지만, 공식 기록에서는 찾아 볼 수 없으니 ‘정명련’으로 통일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정민 한양대 교수의 한국교회사 숨은 이야기 67회 제주도와 추차도의 모자)

그것이 주님께서 바라시고 하늘나라에서도 정명련 선조께서 원하시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고, 이야말로 역사적 근거도 확실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십년 만에 얻은 아들과 부인을 사지로 보내야 하는 황사영의 고뇌와 고통을 기억하면서, 그럼에도 신앙을 지키고자 했던 20대의 열정적 천재학자의 백서는 지금이라도 다시 다뤄져야 합니다.
정명련은 황사영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지상과 천상의 인연으로 연결돼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황사영 백서의 연구도 정명련과 관련해 다시 이뤄지기를 소망합니다.
중요한 건 정명련과 그의 가문인데, 왜 그가 정난주로 둔갑했는지 알고 싶어서 달려간 자리는 실망이 컸습니다.

황사영 백서에 대한 후대의 격렬한 반응은 전체 백서가 아닌 가백서만을 본 것으로 우려가 컸습니다.
백서 원문에는 황사영이 청나라에 조선을 편입해달라고 요청한 부분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편집된 가백서만 보고서 황사영의 이름에 거품을 물었습니다.
그의 요구는 오직 신앙의 자유, 하나였습니다.
백서의 원본은 1894년 갑오경장 당시 의금부와 포도청에 산더미처럼 쌓인 문서를 소각 정리하면서 다시 세상에 나왔고 이를 본 관리가 폐기 직전에 천주교도이자 자신의 친구였던 이건영에게 백서의 원본을 건네면서 세상에 다시 등장합니다.(한양대 정민교수 인용)

이건영은 이를 당시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에게 넘겼고, 뮈텔 주교는 이를 다시 1925년 순교자 79위 시복 당시에 교황 비오 11세에게 봉정하면서 바티칸 민속박물관에서 소장하게 됐습니다.
이것이 바티칸이 황사영 백서 원본을 소장하게 된 연유입니다.
1970년대 중반, 당시 안동교구장이던 두봉 주교는 이 백서가 인류복음화성 고문서고에 있음을 확인하고 한국교회에 알립니다. 그뒤 이 백서를 직접 보려는 노력이 꾸준히 진행되었고, 이제 그 백서는 고국을 떠난 지 76년만에 다시 고국을 방문해 그 피와 땀의 기록을 드러냅니다.
정명련은 이처럼 피어린 역사의 아픔을 온몸으로 끌어안은 황사영의 처이자 추자도에 유배된 아들 황경한의 어머니였고, 나주정씨 가문의 장녀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를 본래의 이름으로, 본래의 위치로 격을 찾아주기를 소망합니다.
전국의 신자들이 제주의 대정성지를 찾아 신앙으로 모진 노비의 삶을 이겨낸 정명련의 신앙을 닮아가길 저는 꿈꾸고 소원합니다.


서울대교구 한강성당에서 노 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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